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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3월 01일(주일) 주일낮예배

  • 본문 : 마태복음 9장 14~17절
  • 제목 : 잔치냐 금식이냐
  • 설교 : 주재형 목사

 

잔치냐 금식이냐 - 스터디 가이드 (호환성 버전)
Study Guide

잔치냐 금식이냐

마태복음 9:14~17 | 송파제일교회 주재형 목사

핵심 설교 요약

1 낡은 부대를 찢는 복음의 거룩한 도전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났다면 삶에는 반드시 크고 작은 '논쟁과 도전'이 일어납니다. 복음은 단순히 내 기존의 삶(낡은 옷, 낡은 가죽 부대)에 좋은 교훈 몇 개를 덧대는(생베 조각) 수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주의 왕이시기에, 내 입맛에 맞는 것만 취하고 나머지는 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내 삶의 전부를 새롭게 빚으시는 "전부냐, 전무냐(All or Nothing)"의 거룩한 도전입니다.

2 형태(Form)가 아닌 '중심(Center)'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우리는 금식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안 합니까?"라고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들은 경건의 '형태(금식)' 자체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배의 형식이 '잔치(기쁨) 같아야 하느냐, 금식(엄숙함) 같아야 하느냐'를 두고 논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형태가 아니라 철저히 '누구로 인한 기쁨이며, 누구로 인한 슬픔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3 신랑 되신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과 애통

예수님은 자신을 '신랑'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신랑이 함께 있을 때는 마땅히 잔치하며 기뻐해야 하고, 신랑을 빼앗길 때(십자가 고난 및 주님의 부재를 느낄 때)는 마땅히 애통하며 금식해야 합니다. 우리의 참된 경건은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를 누리며 '기뻐하는 것'과, 내 죄로 인해 주님과 멀어짐을 아파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탄식 속에 사모하며 '금식하는 것' 사이의 건강한 균형을 가지는 것입니다.

한눈에 보는 구조와 대조

📊 낡은 고정관념 vs 복음의 새 질서

낡은 가죽 부대
종교적 특징 전통과 형식에 얽매인 유대주의적 고정관념. (예: 주 2회 금식하는 습관)
한계와 변질 자신의 경건을 자랑하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전락함.
새 포도주
복음적 특징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새로운 구원의 시대, 그리고 은혜의 생명력.
참된 경건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철저히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중심을 둠.

📊 그리스도인의 두 가지 경건: 잔치와 금식

잔치 (기뻐함)
때 (When)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임마누엘)
영적 의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이미 이루신 구원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기뻐하는 신앙.
금식 (애통함)
때 (When)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십자가, 죄)
영적 의미 나의 심각한 죄나 고난 속에서 주님의 부재를 아파하며, 주님이 장차 이루실 회복을 사모하는 신앙.

본문 심화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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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신랑" (뉨피오스, νυμφίος)
예수님께서 자신을 "신랑"이라고 지칭하신 것은 단순한 비유를 넘어선 엄청난 신적 선언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신랑(남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셨습니다(호 2:19, 사 54:5).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구약에 약속된 그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교회)과 혼인 언약을 맺으러 온 메시야이심을 이 단어 하나로 분명히 선포하신 것입니다.
문맥 마태복음 9장의 흐름: 잔치에서 금식 논쟁으로
본문은 바로 앞선 사건, 즉 세리 마태가 부름을 받고 자기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을 모아 연 '큰 잔치(식사 교제)' 직후에 등장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왜 죄인들과 밥을 먹느냐"고 따졌고, 연이어 요한의 제자들은 "왜 우리는 금식하는데 너희는 밥을 먹고 마시며 즐기느냐"고 따집니다. 옛 질서(율법주의)의 눈으로는 예수님이 열어젖힌 은혜와 구원의 감격(새 포도주)을 결코 이해할 수도, 담아낼 수도 없음을 보여주는 탁월한 문맥적 배치입니다.
역사 1세기 유대인들의 금식 문화
율법이 명한 공식적인 금식일은 1년에 단 하루 '대속죄일'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국가적 멸망과 포로 생활을 거치며 경건을 갈망하던 유대인(특히 바리새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는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초기에는 메시아를 대망하는 순수한 열정이었으나, 1세기에 이르러서는 얼굴을 흉하게 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건을 자랑하며, 금식하지 않는 자를 정죄하는 '종교적 훈장'으로 심각하게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중심 피 값으로 신부를 얻으신 신랑의 사랑
예수님께서 "신랑으로 오셨다"는 말씀 속에는 십자가 복음의 정수가 담겨 있습니다. 완전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굳이 '신랑'이 되실 필요가 없었음에도, 죄로 얼룩져 죽어 마땅한 우리를 '신부'로 삼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단지 결혼식을 즐기러 오신 것이 아니라, 신부인 교회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러(신랑을 빼앗길 날) 오셨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잔치와 금식)는 바로 나를 위해 피 흘리신 그 신랑의 맹렬한 사랑에 대한 벅찬 반응입니다.

생각과 나눔

Q1.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 중 내 입맛에 맞는 것만 취하고(생베 조각), 내가 고집하는 낡은 고정관념이나 습관(낡은 가죽 부대)은 버리지 않으려 했던 적은 없습니까?

Q2. 나의 경건 생활(예배, 기도, 봉사 등)은 나를 구원하신 주님으로 인한 기쁨(잔치)이나 애통함(금식)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종교적 의무감입니까?

Q3. "늘 우울한 자는 이미 이루신 일을 잊은 자요, 늘 즐거운 자는 장차 하실 일을 잊은 자다"라는 프랫 교수의 말에 비추어 볼 때, 지금 내 신앙은 '잔치의 기쁨'과 '금식의 애통함'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이루고 있나요?

잔치냐 금식이냐 - 스터디 가이드 (호환성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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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냐 금식이냐

마태복음 9:14~17 | 송파제일교회 주재형 목사

핵심 설교 요약

1 낡은 부대를 찢는 복음의 거룩한 도전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났다면 삶에는 반드시 크고 작은 '논쟁과 도전'이 일어납니다. 복음은 단순히 내 기존의 삶(낡은 옷, 낡은 가죽 부대)에 좋은 교훈 몇 개를 덧대는(생베 조각) 수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주의 왕이시기에, 내 입맛에 맞는 것만 취하고 나머지는 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내 삶의 전부를 새롭게 빚으시는 "전부냐, 전무냐(All or Nothing)"의 거룩한 도전입니다.

2 형태(Form)가 아닌 '중심(Center)'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우리는 금식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안 합니까?"라고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들은 경건의 '형태(금식)' 자체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배의 형식이 '잔치(기쁨) 같아야 하느냐, 금식(엄숙함) 같아야 하느냐'를 두고 논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형태가 아니라 철저히 '누구로 인한 기쁨이며, 누구로 인한 슬픔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3 신랑 되신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과 애통

예수님은 자신을 '신랑'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신랑이 함께 있을 때는 마땅히 잔치하며 기뻐해야 하고, 신랑을 빼앗길 때(십자가 고난 및 주님의 부재를 느낄 때)는 마땅히 애통하며 금식해야 합니다. 우리의 참된 경건은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를 누리며 '기뻐하는 것'과, 내 죄로 인해 주님과 멀어짐을 아파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탄식 속에 사모하며 '금식하는 것' 사이의 건강한 균형을 가지는 것입니다.

한눈에 보는 구조와 대조

📊 낡은 고정관념 vs 복음의 새 질서

낡은 가죽 부대
종교적 특징 전통과 형식에 얽매인 유대주의적 고정관념. (예: 주 2회 금식하는 습관)
한계와 변질 자신의 경건을 자랑하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전락함.
새 포도주
복음적 특징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새로운 구원의 시대, 그리고 은혜의 생명력.
참된 경건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철저히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중심을 둠.

📊 그리스도인의 두 가지 경건: 잔치와 금식

잔치 (기뻐함)
때 (When)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임마누엘)
영적 의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이미 이루신 구원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기뻐하는 신앙.
금식 (애통함)
때 (When)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십자가, 죄)
영적 의미 나의 심각한 죄나 고난 속에서 주님의 부재를 아파하며, 주님이 장차 이루실 회복을 사모하는 신앙.

본문 심화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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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신랑" (뉨피오스, νυμφίος)
예수님께서 자신을 "신랑"이라고 지칭하신 것은 단순한 비유를 넘어선 엄청난 신적 선언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신랑(남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셨습니다(호 2:19, 사 54:5).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구약에 약속된 그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교회)과 혼인 언약을 맺으러 온 메시야이심을 이 단어 하나로 분명히 선포하신 것입니다.
문맥 마태복음 9장의 흐름: 잔치에서 금식 논쟁으로
본문은 바로 앞선 사건, 즉 세리 마태가 부름을 받고 자기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을 모아 연 '큰 잔치(식사 교제)' 직후에 등장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왜 죄인들과 밥을 먹느냐"고 따졌고, 연이어 요한의 제자들은 "왜 우리는 금식하는데 너희는 밥을 먹고 마시며 즐기느냐"고 따집니다. 옛 질서(율법주의)의 눈으로는 예수님이 열어젖힌 은혜와 구원의 감격(새 포도주)을 결코 이해할 수도, 담아낼 수도 없음을 보여주는 탁월한 문맥적 배치입니다.
역사 1세기 유대인들의 금식 문화
율법이 명한 공식적인 금식일은 1년에 단 하루 '대속죄일'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국가적 멸망과 포로 생활을 거치며 경건을 갈망하던 유대인(특히 바리새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는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초기에는 메시아를 대망하는 순수한 열정이었으나, 1세기에 이르러서는 얼굴을 흉하게 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건을 자랑하며, 금식하지 않는 자를 정죄하는 '종교적 훈장'으로 심각하게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중심 피 값으로 신부를 얻으신 신랑의 사랑
예수님께서 "신랑으로 오셨다"는 말씀 속에는 십자가 복음의 정수가 담겨 있습니다. 완전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굳이 '신랑'이 되실 필요가 없었음에도, 죄로 얼룩져 죽어 마땅한 우리를 '신부'로 삼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단지 결혼식을 즐기러 오신 것이 아니라, 신부인 교회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러(신랑을 빼앗길 날) 오셨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잔치와 금식)는 바로 나를 위해 피 흘리신 그 신랑의 맹렬한 사랑에 대한 벅찬 반응입니다.

생각과 나눔

Q1.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 중 내 입맛에 맞는 것만 취하고(생베 조각), 내가 고집하는 낡은 고정관념이나 습관(낡은 가죽 부대)은 버리지 않으려 했던 적은 없습니까?

Q2. 나의 경건 생활(예배, 기도, 봉사 등)은 나를 구원하신 주님으로 인한 기쁨(잔치)이나 애통함(금식)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종교적 의무감입니까?

Q3. "늘 우울한 자는 이미 이루신 일을 잊은 자요, 늘 즐거운 자는 장차 하실 일을 잊은 자다"라는 프랫 교수의 말에 비추어 볼 때, 지금 내 신앙은 '잔치의 기쁨'과 '금식의 애통함'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이루고 있나요?